강의 소개
동양적 근대화와 함께 발전한 한국현대시는, 21세기에 들어 좀 더 한국어로만 감각 가능한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그러한 과정에서 이전과 달리 현대시의 근간이었던 서구 현대시 및 그것을 수용한 일본 및 다른 동양의 현대시에 대한 수요가 감소함에 따라, 오늘날의 한국의 독자와 작가에게 ‘외국시’에 대한 편견은 더욱 커져만 가는 상황입니다.
이 수업이 누군가에게는 외국어는 언제나 외국어일 뿐이라는,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한국어가 아니고서는 시를 시로 느낄 수 없다는 모든 편견을 집어던질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 번역가 최성웅과 함께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작가를 오직 본연의 낯섦으로 반겨봅니다.
강의 계획
*읽는 텍스트는 변경 가능합니다.
*강의에서 함께 읽을 시들을 강사가 원어로 낭독합니다.
*준비된 번역으로 수강생들과 함께 시를 읽고 나서 무한히 더듬어 나갑니다.
- 1주차
거리 밖 거리의 언어들 : 레온 셰스토프 / 기형도 / 루쉰 / 이상
- 2주차
익숙하지만 낯선 언어들 : 롤랑 바르트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미즈노 루리코 / 차학경
- 3주차
내면 속 내면의 언어들 : 이브 본푸아 / 빈센트 밀레이 / 콘스탄틴 카바피 / 월트 휘트먼 / 파울 첼란
- 4주차
낯설지만 익숙한 언어들 : 폭류경 / 쥘 쉬페르비엘 / 앙리 미쇼 / 에드몽 자베스
- 5주차
환원되지 않는 언어들 : 니카노르 파라 / 프랑시스 퐁주 / 폴 발레리 / 앨런 긴즈버그
- 6주차
비와 무와 막의 언어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스테판 말라르메
강사소개
문학번역가 및 어학강사. 1984년 9월 21일 출생. 서울과 파리, 베를린, 뮌헨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5년 3월 출판사 읻다를 설립, 2017년 말까지 대표로 역임하며 ‘괄호시리즈’, ‘읻다시인선’ 등을 기획 및 출판하였다. 이후 2년 간 키토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리고 2020년 말부터는 도쿄에서 일과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 2022년 폴 발레리의 『테스트 씨와의 하룻밤』 문체연구로 석사논문을 발표하였으며, 현재 중남미문학 가운데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팔방치기』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2024년 9월 ‘옮김과 들임’을 설립하여 외국어어와 문학 및 번역 관련 유·무료 모임과 강의를 제공한다. 프랑스어권에서는 폴 발레리의 『테스트 씨』, 에드몽 자베스의 『예상 밖의 전복의 서』 등을, 독일어권에서는 릴케의 『두이노 비가』 등을 옮겼으며, 현재는 스페인어권에서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팔방치기』, 『유희의 끝』 등을 작업하고 있다.
수업방식
온라인으로 진행하며 통신 상태가 양호할 경우 카메라를 설치하여 화상으로, 아닐 시 온라인 칠판을 활용하여 음성으로 수업한다.
수업시간
*개인사정으로 미리 약속된 시간에 수업을 듣지 못할 경우 해당 수업 전날까지 미리 알릴 경우에만 강사와 협의하여 월1회 조정 가능하며 그 외는 결석으로 처리.
강의 문의 및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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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 후기
번역을 하고, 시를 읽고 씁니다. 홀로 작업하며 느꼈던 한계와 권태를 깨고, 감각하는 방식을 달리하고자 수업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수업은 선생님의 번역과 해석을 주로 따르고, 그것을 각자의 호흡으로 낭독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우선, 작품을 접하기 전에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듣게 됩니다. 일상적인 응시와 감각을 뒤틀고, 감각하는 몸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지요. 우리는 숨을 참거나 걸음을 조금 달리하는 것에서부터 일반의 감각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기존의 읽기 방식을 탈피하는 경험을 합니다. 작품을 읽을 때 암송과 낭독뿐만 아니라, 행과 연의 기능을 살핍니다. 작품의 흐름과 구조, 의도가 다르게 읽히게 되지요. 타인의 호흡과 나의 호흡을 대조하며, 보다 내밀하게 언어에 기능하고 있음을 느끼기도 합니다. 무뎌진 감각을 돌려놓고, 스스로 연마할 수 있어야 롱런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본 수업 덕분에 그 방식과 태도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 번 더 감각하고, 응시하고, 마침내 도약합니다.
- 전세리 번역가
최성웅 번역가의 수업을 신청했던 첫 번째 이유는 단순히 외국 시를 읽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의 수업에서 처음 보는 시들을 만났습니다. 갓 번역된 따끈한 시들이었지요. 그런데 그의 수업을 들으면서 번역이 뭘까? 라는 주제에 차츰 흥미가 생겼습니다. 저 사람은 자신이 퐁주도 아닌데, 파울 첼란도 아닌데, 릴케도 아닌데 왜 저렇게까지 그들의 시를 애착하는 걸까. 수업을 들으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번역가는 단순히 외국 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사람이 아니라 텍스트와 머리끄덩이를 싸운 사람이구나, 얻어맞고 사랑한 사람이구나, 시를 어깨에 메고 온 사람이구나. 또한 그와 함께 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무엇으로보다 아름답지 않은 것에 우리는 왜 자꾸 끌리나, 라는 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책이 자꾸 발을 안 씻고 우리 집에 들어옵니다. 그게 더 반가워졌습니다. 미쇼가 말했습니다. 장례시장은 늪지에서 벌어져야 하리라. 죽은 자를 뒤따르는 자들도 곤경에 처해야 올바르지 않겠는가. 한 편의 시가 쓰이는 순간 우리는 시에 대한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누군가와 긴긴 대화를 나누며 말입니다.
- 문보영 시인
시를 쓰고 불어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모르는 세계에 가닿고 싶어 수업을 신청했습니다. 서로의 목소리를 나누는 동안 언어가 가지는 본연의 아름다움과 날 것에 가까운 어둠, 인간 속의 내밀한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언어로, 다른 결로, 다른 시선으로 시와 삶을 더듬어보았던 낯설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어제, 오늘, 내일의 ‘나’를 동일시하던 생각에서 벗어나 다만 매 순간만이 가질 수 있는 호흡과 리듬을 사유하게 되었습니다. 시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읽어나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감각과 상식을 전복하는 것은 굳어진 ‘나’를 부수고 망가트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나’를 세울 수 있는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환원되지 않은 ‘이전’의 공간으로 발을 디딜 수 있게 이끌어주신 최성웅 강사 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언어가 불가능한 폭류 너머에서 다시 마주하길 바랍니다.
- 강혜빈 시인
외국어를 전혀 몰라도 외국시를 원어로 듣는다는 건 특별한 경험입니다. 어쩌면 시인은 작곡가, 시는 악보며 낭독자는 연주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는 한번 완성되었다가 그대로 박제되는 불멸의 텍스트 같은 것이 아니라, 시인, (낭)독자, 감상자와 같은 주체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항상 재생산되는 음악일지도요.
그런 의미에서 최성웅 선생님의 강의는 하나의 음악 공연이며, 동시에 작곡가와 악보, 배경 역사에 대한 해설이기도 합니다. 앨런 긴즈버그나 파울 첼란의 시는 당시 시인 자신의 육성으로 낭독했던 녹음 파일을 듣기도 했는데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음악이 국적과 민족을 초월하는 특수한 언어임을 생각한다면 시가 가진 음악성, 나아가 그 예술성과 미학에 대해 이보다 더 잘 이해하기 쉬운 강의는 없었습니다.
- 수강생 J
처음 수업을 신청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강독할 시인들의 목차를 본 다음이었습니다. 국내와 국외 작가들로 구성된 명단은 제게 낯설고도 익숙했는데요, 소설가로 유명한 이름도 있었고 생경한 이름도 있었습니다. 국적이나 활동했던 시기 모두 달랐지만 시를 썼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저는 이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왜일까요? 우선은 시인이라고 한다면 한국 시인들에게 보다 익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그들의 시가 쉽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막연함이 있었습니다. 저는 최성웅 번역가의 강독 시간을 통해 독서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었습니다. 제게 시 읽기란 주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루어졌는데요, 항상 번역 시에 대한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직접 원문을 번역한 번역가에게 듣는 시에 대한 감상과 체험이란 어떤 걸까, 하는 호기심도 컸고요. 고유하다고만 여겨졌던 혼자만의 읽는 시간이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얼마나 즐거울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번역을 통해 좋은 시를 접하고 싶었습니다. 다양한 시들과 함께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분들에게 이 수업을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 오은경 시인
시라는 것이 과연 쓰인 언어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을까, 다른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심 때문에 외국어로 쓰인 시는 늘 멀고 낯선 것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수업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두드리면서, 친숙한 이름들을 낯설게 보고 낯선 이름들 가운데서 친숙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시를 읽어나가며 말 너머를 더듬고, 그 때마다 새로운 문들이 열려 모르던 세계를 내다 보고 더 많은 것들을 읽어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남수빈 디자이너